재투성이 소녀
1장 재투성이 소녀
*이 글은 동화 <신데렐라>와 디즈니 애니메이션 <신데렐라>를 각색했으며, <미녀와 야수>, <키다리 아저씨>, <소공녀>, <소공자>, <윌러비의 늑대들>, <시크릿 가든>, <콩쥐 팥쥐>, 러브홀릭의 노래 '차라의 숲'의 제목 등 이곳 저곳에서 가져오기도 했다.
이름의 뜻이 ‘재투성이 소녀’인 열두 살 차라는 사실 아버지가 바다에 나갔다 돌아오지 않아 계모와 두 언니들이 시키는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고 있었다.
1층에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겹겹이 깎은 유리창은 아버지가 먼 곳으로 항해를 떠나기 전에 네 식구를 위해 만들어 준 기념품이었는데, 차라는 계모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그 이유는 계모의 개인용 거울보다 이 유리창이 더 예뻤기 때문이었다) 이 유리창 곁에 날마다 시간 날 때마다 앉아서 허공에 몽상을 띄우곤 했다. 그 몽상이란 이런 것들이었다. 가볍고 푸른 천으로 만든 구두를 신고 아는 사람들과 춤추러 가기, 윗몸을 이리저리 기웃기웃거리며 유리창이 햇빛이나 달빛이 쏘는 각도에 따라 다른 빛을 내쏘는 모습 살피기, 계모가 집 장식에 돈을 쓰지 않아 황량한 집안에 요정들이 착한 마법을 써서 아름답고 우아한 그림 액자를 여럿 걸어놓고 거실 벽난로에는 커다란 불을 활활 지펴 놓기, 창 밖의 여러 나무들에서 열매가 하나라도 열리면 신나게 따러 가기 같은.
“아버지가 보고 싶다...” 에이프런을 입고 손에 큰 국자를 든 채로 부엌에서 잠깐 나온 차라는 이렇게 되뇌이며 유리창의 깎은 면을 만지작거렸다. 바깥은 늦가을이라 추워지고 있었으며, 느티나무와 미루나무, 소나무, 참나무, 느릅나무, 감나무, 사과나무, 자작나무, 앵두나무 등 창 밖 과수원 나무들이 골고루 추위를 느끼며 도시와 시골의 경계, 숲 속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차라는 나무들을 가만히 비춰주는 달이 있는, 아버지의 승마복 무릎처럼 매끄럽게 깎아 만든 유리창을 주욱 가만히 쓰다듬었다.
아버지가 오랜 마지막 항해를 떠나기 전 마땅치 않아 했던 ‘집 명의를 아내에게 옮기기’를 계모는 부단한 종용과 단맛 나는 설득으로 실현에 옮길 수 있었다. 그리고 계모가 세 딸을 모두 자신의 가족처럼 아끼겠다고 부단히 말해서 아버지는 그걸 철석같이 믿으며 항해를 떠났고, 그만 돌아오지 못했다.
차라는 애도 기간이 지나고 시간이 흐르면서 가끔 아버지가 탄 배에 대한 생각이 났다. 배에 대해 관심이 많은 차라는 그 배는 여러 돛이 달려서 바람의 방향과 세기에 따라 키와 노를 활용해 나아가는 배일 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차라 자신은 이름처럼 난롯불을 켜서 그 불이 재로 돌아가면 다시 딱딱하게 식은 난로에 불을 켜 놔야 하는 신세라 아무 데로나 출렁이는 배는 지금 여기보다 멀고 먼 것으로 느껴졌다. 오늘도 거실 벽난로에 계모가 통나무째 집어넣은 땔감이 어느새 다 떨어져서 차라는 나가서 잔가지들을 집어오느라 추운 날씨에 나갔다 온 참이었다.
2장 “언젠가 마법” 언니들과 계모
두 언니들은 마법을 조금 할 줄 알았는데 주로 차라에게 심술 부리는 데 마법을 쓰곤 했다. 보이지 않는 바나나 껍질을 한짐 든 차라의 앞길에 깔아놓기도 하고, 차라가 부엌으로 향하는 평평한 길을 걸어가면서도 급경사를 걷듯 힘겹게 걸어야 하는 주문을 걸기도 했다. 사실 차라는 마법을 할 줄 몰랐지만, 마법이 나오는 이야기들은 많이 알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 새로운 어머니의 딸들이 마법을 쓸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차라는 맘껏 환영했다.
그러나 이야기들에 나오는 마법은 고급이고, 선한 요정들이 지혜롭게 활용해서 모든 사람이 행복해지는 데 활용된 반면, 언니들의 마법은 어디서 배웠는지 마치 어머니인 계모의 인격을 반영하듯 사소하면서도 어둡고 퀘퀘한 면모를 띠었다. 차라는 세 사람을 위해 집안일 하느라 정신없어서 배워 볼 틈이 없었고, 계모 자신은 상상력이 부족해 마법을 못 썼으나, 계모는 양옆에 두 딸을 거느리고 경고하듯 집 안을 수시로 여기저기 다니며 차라에게 잔소리와 경고를 퍼붓곤 했다. “차라, 문고리 닦았니?“ “차라, 거실 벽난로가 꺼져간다. 빨리 다시 켜놓지 않으면 네 발 앞에 미끄러운 바나나 껍질을 놓겠다!“ 그러면 열두살 차라는 기분이 상했지만, 두 언니들은 계모의 이런 말에 와 하고 웃으면서 함부로 차라의 어깨를 슬쩍슬쩍 밀치곤 했다. 한번은 차라가 ”또 뭐요?“하고 다른 할 일이 있나 하고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까다롭고 이기적인 계모가 기분이 상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이제 오래 전부터 집 안의 모든 살림은 차라의 몫이 되기 시작했다. 이런 사실의 장점이 있다면, 부엌에서 요리하다 남은 것을 모두 먹어서 배를 곯을 일은 없다는 것뿐이었다. 차라는 빨리 자라 키 큰 여자아이가 되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계모가 차라가 있는 공간에 들어오기라도 하면 차라는 자기도 모르게 부르르 떨며 뻣뻣하게 일어났다. 계모는 차라를 볼 때마다 소리를 지르며 트집 잡아 야단쳤기 때문이었다. 계모는 또 차라의 가정교사를 해고했고, 차라에겐 시간 나면 책을 보든지 하라고 말을 내뱉었다.
이후 가게 된 시골 학교는 아버지가 세상 떠난 걸 표시라도 하듯이 계모의 손으로 그만 떠나야만 했다. 차라가 창 밖으로 나무만 하염없이 쳐다보기 때문에 학교 갈 준비가 안되어서 그리고 잔병치레에 시달려서라는 말들이 이유로 제시되었다. 차라의 집을 방문한 선생님은 차라를 보고 얘길 나누고 싶었지만 계모와 두 언니가 아프다며 못 보게 해 줄곧 돌아가야 했다.
3장 집과 도시의 거리
아버지가 손수 지은 집은 도시에서 소문날 정도로 아름다웠다. 자작나무를 자르고 잘 깎아 흰색으로 만든 기둥과 보가 한데 어울려 보기 드물게 예쁜 조화를 이룬 집이었다. 동남향의 2층 집은 가로로 널찍해 손님방으로 쓰일 수 있는 방들이 남았다. 계모와 두 언니는 가끔 차라는 모르고, 그들만 아는 지인들을 초대해 거한 디너 파티를 열곤 했다.
바닥을 감싸는 힘이 바닥에서부터 올라와 머금어지는 석재와 살짝 뜬 목재들 위에 지어진 이 물 위 도시, 힐츠하인에서는 밤마다 바다에서 물이 역류해 꽁꽁 싸인 석재와 목재들이 일제히 물 위에 둥둥 떠오르면서 동시에 도성에는 밤의 루미나리에 빛 축제가 시작되었다. 모든 석재와 목재는 물 표면에 띄운, 힘 들어있는 부표들이 짜임새 있게 받치고 있었으며, 왕궁 바깥은 각종 들짐승들이 숲을 달리는 흙과 흙을 감싼 생 나무로 범벅이 되었다. 아버지가 주신 유리창 속으로도 이 루미나리에 축제 빛은 차츰차츰 꿰뚫고 들어와서 차라의 시선을 온갖 빛깔로 물들였다. 차라는 속으로 또 말했다.
”이럴 때는 아버지가 여기 창가에 나랑 같이 계시면 얼마나 좋을까? 아버지가 보고 싶다.“
이 도시는 사실 온 나라의 수도였다. 이 나라는 대륙의 주인 탐라 나라에서 서북쪽으로 내민 땅 위에 비교적 최근에 건국된 나라였으며, 그 이름은 힐츠 왕국이었다. 힐츠에는 오래 전부터 기사도가 발흥했는데, 종교 세력이 약한 대신 고유의 마법과 무도가 발달했다. 힐츠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커다란 만이 있고 그 자리에 크고 융성한 탐라와 조그만 님이라는 나라들이 있다. ‘루르 비엔의 이야기’에서 백설공주인 루르 비엔이 자신을 깨운 왕자와 함께 국경의 숲을 통해 도망친 곳이 바로 님 나라이다.
힐츠는 밀과 보리를 심고 우유와 버터, 치즈를 생산하는 나라이다. 수도인 이 도시의 이름은 힐츠하인이었다. 차라가 사는 집은 힐츠하인의 도회와 시골의 경계선에 자리잡은 어느 오래되고 바랜 주택가가 놓인 흰 빛과 은빛의 가장자리를 원 호 모양으로 채워내고 있었다. 그 경계에는 키가 크고 작은 나무들이 추적추적 자리잡고 있었다. 힐츠하인만의 특산품은 완벽한 버터였다. 길다란 국자를 들고 휘휘 저어서 허공에 달아 놓은 네모 틀을 노란빛으로 채우는 과정을 통해 감칠맛 나는 버터를 만드는 부엌사람들(힐츠에서는 버터가 세심하고 귀한 사람이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만드는 사람의 남녀, 귀천 구분을 가리지 않았다)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저편 다른 나라로부터 힐츠하인에 나타난 계모와 두 딸은 손으로 하는 일은 모두 차라에게 밀쳐 놓았다. 차라는 요리를 잘했으므로 지혜로운 차라가 조심하지 않았으면 자신이 만들어 놓은 버터를 너무 많이 먹어서 살이 쪘을 것이다.
4장 왕자를 위한 무도회
힐츠하인 안 여러 거리를 걸어 다니다 보면 어김없이 커다랗고 화려한 석조 궁전이 나타난다. 그 정문에는 근위병들이 보초를 서고 있었으며, 물위에 띄운 조경은 사계절 꽃과 허브풀들이 번갈아 가며 꽃을 피웠고 흙과 나뭇가지와 얕게 심은 넝쿨식물들을 정원사들이 끊임없이 손질함으로써 유지되었다. 궁전 자체는 3층 규모에 따뜻하고 우아한 손님용 좌식 응접실과 바깥 활동이 주로 이루어지는 입식 공간이 공존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차라는 아직 너무 어렸고 업무로 궁정에 규칙적으로 드나들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 궁정에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궁전에는 열다섯살 난 왕자가 살고 있었다. 왕자는 3년 전에 탐라에 유학 가서 기사도와 천문학, 탐라 고유의 마법, 춤 등 여러 가지를 배우고 올 가을에 갓 돌아왔다. 왕은 이번에 왕자의 귀국을 축하하는 뜻에서 무도회를 열었는데, 왕자에게 어울리는 신부감을 탐색하는 뜻에서 나라 안 열한 살 위 젊은이들이 후견인과 함께 모이라고 선포했다. 물론 왕도 실제로 왕자의 나이인 열다섯살보다 나이를 많이 먹은 여성보다는 열다섯살 이하의 어린 사람들을 선호했지만, 행사가 잘되고 행사에 권위를 더하기 위해 뭇 젊은이들을 모이라고 한 것이다. 또 왕자는 탐라에서 모든 공부를 잘 마쳤기 때문에 왕이 왕자를 자랑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차라가 사는 집에도 금빛 구불진 글씨가 아롱진 초대장이 어느덧 날아왔다. 언니들 중 하나인 아뷔엘은 열네살이어서 새로 만날 또래의 왕자를 상상하며 모처럼 설레는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동생인 언니 레쀠는 열세살인데, 남자처럼 키가 커서 열다섯 살쯤 되어 보였다. 둘은 드레스부터 레이스 속치마까지 다 까다롭게 고른 다음 평소처럼 차라에게 어려운 빨래와 손질을 맡겼다. 그런데 솜씨 있는 차라가 가만 있을 리 없었다. 친절한 이웃 노부부 중 부인에게 달려가 이런 옷들은 어떻게 빨아야 하는지 배워 와서 배운 그대로 해 보았고, 잘 되었으며, 아뷔엘과 레쀠는 눈치도 못 챘다.
무도회가 다가오면서 계모는 초대장을 차라의 눈 앞에서 흔들어 보이며 차라에게 말했다. ”이 초대장은 우리 집으로 온 거니까 우리 집의 주인인 나와 내 직계자녀인 아뷔엘과 레쀠가 가면 되겠지? 차라 너는 그냥 집에 있어라.“
많은 걸 기대하지 않았던 차라는 말했다. ”저녁 식사는 무도회에서 하고 오실 거예요?“
”당연하지. 집에 아무도 없을 테니 네가 챙겨라. 고급 족발은 손대지 말아라. 우리 세 식구가 밤에 먹으려고 남겨 놓은 거야.“
몇 시간 후 차라가 머리를 빗겨 준 채로 아뷔엘과 레쀠 두 언니들은 계모와 함께 마차를 탔고, 차라는 다시 유리창가로 가서 무지개 빛이 아롱지는 마차를 내다 보며, 못 가게 됨을 조금은 아쉬워하며 ‘세 식구’를 동경했다.
이때 왕궁에서 왕자는 발코니 레일을 타고 올라온 넝쿨 식물들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발코니 아래 바깥 흙으로부터 정원사가 예쁘게 가꾸어 향기로운 각종 꽃들이 발코니 레일을 타고 올라와 만개했다.
지켜보던 시종장이 농담 반으로 말했다.
”왕자님, 좀 이따 많은 사람들과 춤을 추실 텐데 지금 꽃향기에 열중하시기보다는 춤 연습을 하셔야 하지 않을까요?“
”시종장님.“ 왕자가 겸손하게 말했다.
”여긴 우리 나라니까 제가 주최하는 게 마땅하지만, 솔직히 탐라에서 저도 춤도 잘 췄고 미녀들도 실컷 보았다구요. 오늘 제 나이보다 어린 친구들이 얼마나 오겠어요. 저는 별로 기대 안 해요. 그 시간에 제 사랑하는 꽃들이나 감상하는 게 낫지.“
5장 요정이 된 나의 할머니
부엌을 싹싹 청소하고 마른 빵과 치즈로 끼니를 때운 뒤, 차라는 2층 이어 다락까지 올라갔다.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 같아서 다락을 청소하고, 또 시원한 비를 맞고 기분 전환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생각. 아빠가 비와 함께 하늘에서 내려오는 상상을 다락에서 징하게 한 적이 있어서 아버지를 그려보고 싶었다.
그런데 다락 바닥에 조금 작은 청녹색 고깔모자 하나가 나뒹굴고 있었다. 고깔의 윗부분에서 별빛 같은 환한 빛이 났다. 차라는 누구 것일까 주위를 살펴보았다.
다락방 속 어느 구석엔가에서 작달막하고 주름잡힌 손 하나가 불쑥 들어온 햇빛처럼 나타났다. 차라는 손 특유의 색깔과 주름잡힌 방향을 통해 주인이 누군지 알아채고 깜짝 놀랐다. 어려서 차라의 손을 보듬어 주며 기사와 마법과 요정 이야기를 들려주시던 큰고모할머니였다! “그럴 리 없어” 차라는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그때 할머니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나는 힐츠하인 전체에서 가장 뛰어난 이야기꾼, 너의 고모할머니 루다란다, 마법의 요정이 된 날 알아보지 않을래?“ 고모할머니는 일어나면서 작아졌던 몸을 쭈우욱 폈다. 생각이 빠른 차라는 루다의 말을 금방 이해하고 “그런데 할머니, 우리 집 다락에 왜 나타나신 거예요?“ 하고 물었다. 루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 궁금하지? 나는 왕궁 무도회에 너를 보내려 왔단다.“ 하얀 에이프런을 입고 있던 차라는 자기도 모르게 앞치마에 두 손을 걱정스럽고 어색하게 비비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말했다. “새어머니가 싫어하실 거예요.”
루다가 이번에는 고개를 저었다. “차라야, 내가 네게로 올 수 있는 기회는 세네 번뿐이야. 이런 기회는 쉽사리 다시 오지 않아.” 그리고 루다는 고깔을 눌러쓰고, 자신이 어깨에 두르고 있던 길고 따뜻한 파란 망토를 끌러서 차라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나랑 같이 이번 무도회 가지 않을래?”
6장 갈아입음, 갈아신음
“네.” 하고 아무것도 모르면서 차라는 속삭였다. 그러자 망토가 살짝 벗겨지면서 차라의 윗몸 그리고 다리 부분으로 날씬하고 우아한 수를 놓은 풍성한 파란 치마가 찰랑이며 내려왔다.
또 할머니 요정 루다는 차라의 긴 밤색 머리를 살짝 쓸어내렸는데, 그러자마자 차라는 얌전히 하나로 땋아 묶은 머리에, 목에는 희귀한 델름꽃 목걸이를 살며시 두르고 차양이 있는 과일모자를 머리에 쓴 자신을 발견했다.
루다가 차라에게 말했다. “1층에 내려가서 바깥 호박밭에 가 보자.“ ”왜요?“ ”가서 보여줄게.“
요정 할머니 루다가 말했다 “잠깐! 맨발로 갈 순 없지.“ 하면서 순식간에 차라의 주방용 천으로 싸맨 발은 투명한 뭔가에 새로 감싸졌다. 그것은 춤추는 데 신는 구두인데, 단단하고 투명한 유리로 되어 있었다. “무도회에서는 주로 왈츠를 추니까 가기 전에 내가 호박밭에서 왈츠 스텝 가르쳐 줄게.”
둘은 다락방에서 내려가 빈 집 안을 가로질러 집 뒤에서 커다란 호박을 키우고 있던 밭으로 향했다. 주름잡힌 페티코트 위에 외투를 입은 루다는 차라의 손을 잡고, 가볍게 날아올라 한동안 공중에서 편안히 왈츠 스텝을 밟았다. 차라는 따라하면서 깜짝 놀랐다. 정말로 고모할머니가 요정이 됐구나! 이윽고 루다는 실한 호박들을 죽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집 쪽 가장자리 줄에 있는 제일 크고 실한 호박을 가리켰다.
”저 정도면 멋진 마차가 되겠다.“ 그리고 나서 루다는 마법 지팡이를 꺼냈는데, 지팡이 끝부분이 파란 색깔로 빛이 파르르 번쩍이기 시작했다. 호박을 향해 지팡이를 겨누고 루다는 살며시 새 소리 같은 소리를 입술의 떨림으로 되뇌었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호박은 순식간에 커다란 호박 모양 마차로 변했다. 루다는 또 옆을 돌아다니던 흰쥐 두 마리에게 혀 소리로 무얼 속삭였는데, 쥐들 또한 각자 금방 하얗고 날쌘 말 한 마리로 변했다. 루다는 말들의 목에 얹어 있던 고삐를 걸고 호박의 마부석에 앉으며 차라에게 속삭였다. ”뒤에 타. 궁전으로 가자.“
차라는 루다가 모는 호박마차를 타고 궁전으로 달렸다.
루다 할머니가 모는 호박마차는 호박밭의 경사진 땅을 딛고 궁성으로 급히 달리기 시작했다. 곧 길은 잔치에 참석하기 위해 달려가고 있는 마차들로 붐비게 되었다. 부분부분 물에 띄운 숲에는 가을 나무들의 성숙한 향기나는 꽃들이 만발했고, 그때 다른 쪽에서 친한 누군가가 궁성으로 터덜터덜 걸어오고 있다는 것은 차라도 루다도 미처 몰랐다.
마차를 몰던 루다가 유리구두를 고쳐신던 차라에게 한 마디 주의를 주었다. ”오늘 밤 12시가 지나면 호박마차는 호박으로 바뀌고 말들도 흰쥐로 바뀌어. 바뀌지 않으려면 그 쯤에 마차로 돌아와 집으로 달려가야 해. 이따 다시 올게. 그리고, 늬 새어머니 조심해라. 아까 득의만만하더라. 피해 다녀.“
아버지가 곁에 계셨을 때 높은 사람들이 궁전까지 마차를 타고 경주했던 경험을 차라의 몸은 기억했다. 그래서 궁정이 가까워 오자 차라는 자기도 모르게 신이 나 호박마차에서 얼른 내려 달려갔다. 말이 말을 듣지 않아 늦게 도착한 계모와 두 언니들은 마차에서 내려 길에 서 있었는데, 셋을 지나쳐 예쁘고 푸른 드레스를 입고 뛰어가는 차라의 모양새를 그 자리에서 입을 벌리고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왕자 열다섯 차라 열둘.
7장 정신없이 꾸는 꿈
차라는 숲속을 달리고 또 달렸다. 다람쥐들과 토끼들이 바람을 따라 차라와 달렸다. 어느덧 숲이 끝나고 둥둥 떠 있는 3층 석조 궁전 외벽이 눈앞에 드리웠다. 궁전 전체는 길이 난 주변 숲들과 조화를 이루며 나뭇잎들의 초록빛과 어우러졌다. 약간 방향을 틀자 1층 발코니에 누가 있는 게 보였다. 개의치 않았다. 오래 전 돌아가신 어머니 품에 안기듯 껑충 차라는 발코니로 뛰어들었다.
“너 뭐야?”
궁전을 향해 쉼없이 달리다가 어느새 왕자의 1층 발코니로 뛰어든 차라에게 꽃가지를 살며시 손에 든 왕자가 어이없다는 듯이 처음 건넨 말이었다. 차라는 발코니에서 왕자와 맞닥뜨린 것이다. 왕자는 행복한 어린 시절을 지냈음을 보여주는 복숭아빛이 뺨에 감돌았으며, 가슴과 배와 종아리까지 가리는 적갈색 무도회 예복을 가만히 걸치고 있었다. 차라는 전에 아버지가 계실 무렵 경주할 때 스치며 봤던, 목소리가 또렷한 왕의 어린 아들을 기억해 냈다. 지금은 눈매가 날카롭고 빈틈없는 젊은이가 되어 있다고 차라의 느낌이 말해 주었다.
”너 어디서 온 거야? 내 무도회에 온 거야?” 발코니에서 서 있던 왕자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재차 물었다.
차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발코니 입구에 가만히 놓여 있는 은회색 모종삽이 차라의 눈에 들어왔다. 차라는 한 걸음 다가가 모종삽의 손잡이를 꼭 잡고 슬슬 손목을 틀어 보았다.
왕자는 자기도 모르게 보고 있던 꽃에서 얼른 손을 떼고 “너, 뭐야?”라고 되풀이해 말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는 티가 났다.
차라는 말했다. “나는 켈란틴, 열두 살이에요. 왕자님. “
켈란틴은 아버지와 오래 전 돌아가신 어머니가 지어 준 예쁜 이름이었다.
그때 왕자는 자기도 모르게 다른 긴 삽을 들고 도자기 타일로 만든 발코니 바닥을 두드렸다. 자기도 모르게, “켈란틴, 이 꽃들의 종류 알아보겠어? 나랑 같이 찾아 볼래?”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조금은 대담한 켈란틴이라는 여자아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고 싶었다. “좋아요.” 기다렸다는 듯이 차라가 응수했다. 사실 차라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곁에 계실 때부턴 외동딸로서 함께 정원과 과수원에서 꾸준히 정원 일을 연습해 왔고, 아버지는 차라가 심은 꽃이 잘 피어났을 때마다 무릎을 치며 “잘 한다 우리 켈란틴!“ 하고 응원해 주기도 했다.
”봐, 이건 진홍색 매발톱이야." “알아요.” 둘은 정원에서 발코니까지 넝쿨로 올라온, 또는 때마침 정원에 보이는 모든 아름다운 꽃과 풀, 나뭇가지들의 모든 이름과 상세를 하나하나 꼽기 시작했다. 둘의 만만치 않은 설전은 시작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지식을 자랑해도 둘의 능력이 비슷해 서로의 말은 한동안 끊이지 않았다. 차라가 어려서부터 취미가 이쪽이라 정원 가꾸기를 단단히 했기 때문이었다.
이때 회색 망토를 걸친 시종장이, 자릴 비웠다가 어느새 발코니에 다시 들어와서 놀라 지켜보고 있었다. 발코니 옆 벚나무 가지에 큼지막한 올빼미가 가만 가만 끼욱 끼욱 울어댔다.
시종장은 2층 무도회장에 꽃 장식을 지휘하던 왕에게 석조 계단으로 가만히 올라가서 귓속말로 이 기이한 일이 이뤄짐을 보고했다.
“전하, 파란 드레스를 입은 켈란틴이라는 여자 아이가 1층 발코니에 와서 왕자님과 꽃을 함께 보고 있습니다.”
왕은 차라의 의상착의를 듣고 호기심을 드러냈다. “이름은 나도 기억하는데, 먼 바다로 항해를 떠나 돌아오지 못한 파란색을 좋아하는 옛 제2군단장 티아 경의 딸 아닌가? 티아 경이 뭐든 잘 한다고 딸 자랑을 했는데. 그런데 어떻게 내가 그걸 다 기억하나? 자네가 기억해야지.“ 하며 두 사람이 한 바탕 웃었다. 티아 경의 난파 뒤 왕의 명으로 군단장 티아 경의 생사를 확인하러 탐라까지 갔지만 못 찾은 사람이 시종장이었다.
왕자와 차라가 자기들이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저절로 동시에 삽을 내려놓고 나서, 왕자는 차라에게 말했다. “정식으로 인사하지 않았네? 나는 케율 왕자, 알겠지만 나이는 올해 열 다섯 살이야.“ 둘이 통성명을 끝내고 날씨 이야기로, 또 다른 청소년스런 이야기로 옮아가며 이야기하는 사이 테라스에 드리운 늦가을 나뭇가지에서 나뭇잎 하나 그리고 두 잎이 하늘하늘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왕자는 차라에게 기꺼이 자기가 갖고 있던 은회색 모종삽을 선물했다. 다시 왕자에게 부리나케 돌아온 시종장은 이 광경을 목격하고 또 다시 깜짝 놀랐다. 왕자의 모종삽은 탐라에서 발달한 금속공예 명장이 탐라에서 왕자를 위해 안녕 선물로 특별히 아름답게 제작한 것이었다.
차라는 어느새 말을 튼 왕자와 함께 무도회장으로 향했다.
이윽고 왕궁의 문이 열리며 왕이 우렁찬 목소리로 뭇 사람들에게 고했다. “제 아들 케율을 위한 무도회에 오셔서 고맙습니다.“ 거의 모두가 들어가고 나서 한참만에, 두 어린 정원사들은 삽들을 문 옆에 놓아두고 재잘재잘 떠들며 무도회장에 입장했다. 왕자와 차라. 모두 놀랐다. 마치 오래 전부터 두문불출한 것처럼 아무도 티아 경이 없었던 3년 동안 켈란틴, 아니 차라를 기억하지 못했다. 차라의 동네 사람들은 이미 켈란틴이라는 이름을 잊어 가고 있었다. 온 집안 난로에 불을 피우는 시녀 차라로만 알고 있었다.
무도회장에 이미 와 있던 계모와 언니들은 차라가 들어오자 알아보고 얼굴이 누렇게 떴다. 계모는 “너희는 가만히 있어” 하며 차라에게 가서 심한 말로 차라를 쫓아내 버리려고 했지만 왕자가 차라와 웃고 떠들며 모두의 이목을 집중했기 때문에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가까스로 차라의 옆에 자리가 나자 계모는 자식을 아끼는 어머니인 것처럼 가장하고 차라 옆을 지나가면서 차라의 한쪽 귀에 다가가 “너 오늘 집에 오지 마라” 하며 매섭게 노려보았다. 계모를 눈치챌 틈이 없던 차라는 홀딱 놀랐고 가버리는 계모를 목소리로 한번에 알아본 차라는 곧 얼굴이 파래지며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런데 그때 차라의 다른 쪽 귓가에 루다가 다시 와서 부드럽게 속삭였다. ”차라야, 계모는 인색하기 때문에 너처럼 공으로 살림하는 하인이 아니면 좀처럼 고용하지 않으려 할 거다. 그냥 무도회 끝나고 집으로 가면 돼.”
케율 왕자는 그러는 계모의 모습이 뭘 의미하는지 몰랐지만 그걸 보고 왠지 모르게 화가 났다.
왕자는 밖으로 나가서 켈란틴과 함께 사용했던 삽들을 살포시 집어들었다. 왕자가 발코니 가까이 꽃을 가리키는 데 사용한 긴 삽은 어느새 켈란틴에게 선물한 은회색 모종삽과 함께 홀의 바깥 문에 얌전히 기대고 있었다. 왕자는 삽을 가만히 내려놓고 다시 홀로 돌아가, 두 눈 속에 빛나는 켈란틴과 연거푸 춤을 추었다.
홀의 시계가 열두번 치며 자정을 알리기 시작했다.
켈란틴은 퍼뜩 루다가 해 준 말이 기억났다. 이제 열 두시였다!
켈란틴은 문가에서 왕자가 준 모종삽을 잠시 들었다 내려놓고 다시 달렸다.
계모와 두 언니는 부리나케 차라를 쫓아가다가 무도회장 문 옆에 세워두었던 왕자와 켈란틴의 삽들에 걸려 넘어졌다.
호박마차는 아직 흰 말들과 함께 있었다.
얼른 가자, 그러고 루다는 날았다. 급히 걸음을 옮기던 차라의 한쪽 발에서 유리구두가 거짓말처럼 스윽 벗겨졌다. 하지만 뒤를 돌아볼 틈도 없이 차라는 호박마차가 세워진 곳으로 달렸다. 마부석에 앉은 루다가 고개를 돌려서 차라에게 말했다. “켈란틴아, 집에 가면 계모가 뭐라고 하든지 참고 집에 있어야 한다. 그 수밖에 없어. 버텨!“
차라는 유리 구두 한쪽이 벗겨진 채로 집에 도착했다. 벗겨지지 않은 유리 구두 한쪽을 부엌 한쪽에 벗어 두고 헌 주방용 슬리퍼로 갈아 신었다. 호박과 말들은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옷은 차라의 낯익은 에이프런으로 도로 바뀌었다.
그 새벽, 삽 둘을 동시에 집어든 왕자는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내가 준 삽도 두고 간 내 짝을 찾을 수 있을까? 그러다 차라가 유리구두 한 짝을 발자취에 놓고 떠난 것을 보았다. 구두를 쏘아보는 왕자 옆에 아까부터 붙어 있던 한 시종이 말했다. “티아 경의 새 아내가 무도회장에서 그 분에게 귓속말 하는 걸 저도 봤습니다. 티아 경의 집으로 가 보시는 게 어떨까요?“
”그 새어머니, 눈빛이 좀 수상하던데.“
왕자의 한쪽 어깨에 큼직한 손이 얹혔다.
”아버지.“
”안다, 얘야.“
시작부터 장애물에 맞닥뜨린 두 어린 연인이었다.
8장 이 구두 주인 / 거짓말 같다
차라의 아버지 티아 경은 홀로 눈시울을 적시며 집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해안 도로는 왼편에는 때때로 배를 댈 항구를 찾는 배들이 천천히 흘러다니고 있었다. 오른편에는 침엽수들이 그가 그의 집 옆에 오래 전에 심었던 소나무들처럼 뾰족하고 아름다웠다. 티아 경은 이 나무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티아 경이 힐츠 궁정에 다녔던 오래 전 무렵에 탐라와 힐츠 간에 맺었던 산림 조약으로 심긴 나무들이었다. 나무들은 바닷가에 가깝게 심겼고 고운 모래길은 숲과 바다 사이에 가늘게 나 있어서 두 사람이 겨우 나란히 다닐 수 있을 정도였다 “아내는 왜 계속 답장이 없었을까? 이사간 것일까? 무슨 일이 있었나?“ 그는 이런 말들을 되씹으며 길을 재촉하듯 걸었다.
탐라 만 앞바다에서 배가 뒤집혔을 때 아버지 티아 경과 몇몇 선원들은 마침 지나가던 잔치 배를 얻어 타고 탐라의 큰 항구에 무사히 내렸다, 그런데 잔치 배의 기묘한 탐라 사람 여주인이 생명을 구해 줬으니 자기네 항구에서 일 좀 하고 가라고 붙잡았다. 선원들과 티아 경은 생선 말리는 일을 넉달간 해야만 했다. 그리고 나서도 여주인의 강권으로 뒤이어 여러 가지 일을 하느라 계속 늦어졌다, 배편에 계속 집에 편지를 보냈는데 사실은 계모가 집에 오는 편지를 중간에 다 가로채었다. 그러다가 여주인이 마침내 보내주어 도보로 너덜너덜해져 궁전에 도착한 게 바로 무도회 다움날 새벽이었다.
도성 가는 길로 들어선 아버지는 늦가을 살짝 언 길바닥을 조심스레 디뎌 가며 눈앞에 드리운 수도 힐츠하인 도성으로 추운 바람을 마주해 걸어가고 있었다. 성 높은 곳을 올려다보건대 진한 주황색 지붕과 종탑들 대여섯 짝이 바람 든 눈동자 속으로 어른거렸다. 성벽 동남쪽에 새겨진 황금 독수리가 조금씩 가까워지는 느낌이 티아 경의 지친 몸을 에워쌌다. “따뜻하다...” 그는 스스로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머릿속이 정리되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야 그가 그로부터 도망친, 아버지를 이리저리 부리던 탐라의 그 사람이 떠올랐다. 한없이... 다행이도 차츰 잦아들어가며...
켈란틴이 무도회장을 날아서 나오고, 왕자가 뒤따라 달려가자 무도회의 흥도 차츰 잦아들어 버렸다.
왕자는 유리구두를 집어들었다. “그애의 얼굴은 빛났고, 키는 컸다.“ 왕자가 되뇌었다. 그리고 ”나는 잘 기억을 못하겠지만...“이라고 중얼거렸다. 정말이었다. 삽으로 꽃들과 친해졌고, 왈츠 스텝을 맞추는 차라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름다운 빛에 막상 차라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기억이 잘 나질 않았다. 그러나 같이 스텝을 맞춘 유리구두는 기억이 생생했다. 왕자는 무도회장을 치우라는 명령을 내리고 있던 시종장이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그 시간 임금님은 갑옷을 속에 받쳐 입고 홀로 숲에서 차라의 흔적을 찾고 있다가, 충성스런 신하를 다시 만나 놀랐지만 반갑게 인사하고, 무도회 이야기를 해 주었다.
마차들이 간혹 길 위를 딸랑딸랑 지나가고 성이 눈앞에 드리우자 아버지는 헐렁해진 신발 끈을 다시 묶기 위해 허리를 굽히고 앉는자세를 취했다. 그러고 있는데 “티아 경”이라는 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티아 경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누가 나의 이름을, 진짜 이름을 부르는가? 고개를 들어보니 목소리만큼 힘 좋고 몸 됨됨이도 장대한 - 그리고 머리에는 은 코로넷을 가볍게 걸친 - 어느 사내가 그의 앞에서 온통 웃는 얼굴로 서 있었다. 사내는 계속해서 말했다. “난파한 줄 알았는데... 어떻게 돌아오게 됐나? 나는 그대의 임금, 산트르 2세일세. “ 티아 경은 비로소 임금님을 알아보고 정신을 차렸다. “전하! 황공하옵니다. 저는 탐라에서 묶였다 놓여 집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감히 여쭙건데 이 새벽에 성 밖에서 뭘 하고 계십니까?“ 산트르 2세 임금님은 호탕하게 큰 소리로 웃었다. “왕자가 아무래도 티아 경의 따님과 사랑에 빠진 것 같네. 그런데 티아 경의 따님이 자정에 무도회에서 급히 떠나자 하인들을 동원해서 숲속을 찾고 있다네.“ 임금님은 등 뒤에 두 손으로 잡고 있던 삽들을 티아 경에게 내보였다. “내가 알기로 이것은 왕자가 따님과 1층에 있는 발코니에서 꽃을 감상하고 나서 놓아둔 삽들이야. 그런데 켈란틴 양이, 시종장에 따르면 왕자가 준 이 모종삽도 놔두고 그냥 도망쳐 버렸다네.“
티아 경은 웃었다. “우리 켈란틴이군요! 그애는 저와 전 아내와 함께 정원의 꽃 감상을 많이 해서, 꽃이라면 자다가도 일어날 너무나도 좋아하는 꼬마였지요. 그런데 왕자님은 탐라에서 언제 돌아오신 건가요?” “이런, 어떡하나 아무것도 몰랐군! 어제의 무도회가 왕자의 최근 귀환 기념 무도회였소. 갔다 오는 데 3년 정도 걸렸지.“ “저도 그 동안 탐라에 있었습니다. 항구에서 붙들려 잡일을 하고 있었죠.“ 이러면서 티아 경은 간소하달 수도 있는 지난 3년을 털어놓았다. 임금님이 말했다. “거참. 어제 그대의 새 부인과 두 딸도 무도회에 참석했잖아. 그런데 그대에겐 그 동안 답장이 없었다 그거지. 내가 보니 그대의 새 부인은 왕자 옆에서 빛나던 그대 따님에게 겨우 다가가서 귓속말을 한 게 전부야. 그 귓속말이 저급한 거였는지 냉정한 내용이었는지, 멀리서 보기에도 자네 딸 켈란틴의 얼굴이 파래지더군.“ 티아 경의 얼굴도 파래졌다. “전하, 첫번 편지 이후 답장이 없는 걸 알고 이사 갔구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군요. 그 사이에 켈란틴이 어떤 대우를 받았을지, 불안감이 느껴지고 이제는 화가 나려고 합니다. 당장 집에 가봐야겠습니다.“
임금님이 여어 여어 말렸다. “그대는 먼 여행에 지친 상태라 지금 가도 켈란틴의 새어머니와 다른 두 딸들과 그들이 고용한 하인들이 그대를 압도할 것이오. 성에서 가볍게 식사를 하고 기운을 차리고 조금만 쉬다 가시오. “ ”임금님, 바로 그게 탐라의 여주인이 맨 처음에 저에게 한 말이었습니다. 한 시간이 급합니다.“ “성에는 그대가 입술에 대고 정신차릴 약초들과, 건강을 되찾기 위해 마실 수 있는 염소젖이 있고, 그대를 위한 새옷과 새 신발을 마련해 줄 수도 있소.“ 티아 경은 망설였다. 임금님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티아 경에게 다시 말했다. “도성에 가서 잠깐 쉬다가 케율 왕자가 찾고 있는 따님에게 가도록 하지. 새옷 꼭 착용하시고.” 그래서 티아 경은 임금님을 따라서 갔다.
그 새벽에 집에 돌아온 계모는 차라를 매섭게 야단치고 있었다. 계모는 차라가 부엌에 벗어놓은 한쪽 남은 유리구두를 딸들의 발에 맞춰봤으나 맞지 않자, 구두를 집 정면 창밖으로 내다 버렸다. 왕자와 함께 시종의 말에 따라 밖에서 티아 경 집으로 통하는 샛길로 슬슬 다가가던 시종장이 구두에 살짝 머리를 맞았다. 그러나 이 유리 구두는 왕자가 갖고 있던 나머지 한 짝과 완벽히 맞았다.
”뭐, 이러면 여기를 지나칠 수 없겠군요. 생사를 모를 티아 경의 집.“ 시종장이 중얼거렸다.
그 시간, 그 밤 시간에 차라의 맘은 집 안 아무도 없는 불 꺼진 부엌에 앉아 흐느껴 울고 있었다.
이윽고 시종장이 아름다운 흰 집의 정문을 두드렸다.
차라가 어두운 부엌에서 들어 보니 종이 울렸다. 누군가 집을 방문한 것 같았다.
9장 그대 내 품에
차라의 집에 찾아온 첫 번째 손님은 케율 왕자와 시종장이었다.
”왕자님, 누추한 여기까지 와주시다니? 다행히 저와 제 어여쁜 두 딸들이 이 유리구두를 신기 위해 기다리고 있답니다.” 계모가 우연이지만 잘 됬다 싶어 아첨을 떨며 구두를 들고 있는 시종장에게서 뺏듯이 가져와, 자신이 차라에게서 가져갔다가 던져버렸던 그 유리 구두를 왕자 앞에 스윽 내밀었다. 왕자는 낭패를 봤다 싶었다. 확실히 왕자가 가져온 구두와 같은 유리 구두였다. 그러면?
그때 거실에서 주방으로 통하는 문이 살짝 열렸다. “차라! 뭐 하고 있는 거니? 빨리 차 끓여서 케이크와 함께 귀한 손님을 대접해야지. ”계모는 앙칼지게 소리쳤다.
왕자는 놓치지 않고 문밖 차라를 눈여겨 보았다. 감은 좋았지만, 재묻은 에이프런을 입은 키 큰 소녀가 어제 보았던 파란 드레스 입은 고운 레이디였는지는 아쉽게도 기억나지가 않았다.
차라는 다시 문을 닫았다. 차라가 있는, 거실 문 바깥 부엌은 어두웠다. ”문을 지금 열어!“ 루다가 어둠 속에서 차라의 귀에 속삭였다 순간 차라의 머릿속에는 여러 가지 아득한 장면들이 떠올랐다. 되짚다 보니 모두 계모가 등장하는 장면들이었다.
차라는 루다의 속삭임을 곱씹어 보았다. 자신이 행복하려면 바로 지금, 계모와 헤어져야 한다는 것을 전광석화 같이 깨달았다. 차라는 한 발을 떼 놓으며 문을 살짝 열기 시작했다. 어쩐지 거실로 통하는 문 밖에는 모든 사람이 활짝 웃고 있고, 저 멀리 보일 계모도 어색하지만 약간은 웃으며 자신을 반겨줄지도 모른다고 차라는 하릴없이 생각했다. 그리고- 어쩌면 아빠가 잘못 도착한 저 먼 항구에서부터 차라를 만나러 부리나케 걷고 뛰고 하며 다가오시고 있는지도 몰랐다. 이상하게도 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확신처럼 들었다.
”여기 파티에 오신 켈란틴 양이 어디이신가요?“ 시종장이 계모에게 물었다.
계모는 다시 한번 속이기 위해 놀란 척하며 말했다 “아, 차라는 많이 아파서 무도회에 못 갔는데요? 우리 딸 둘이 갔죠.“ 그 때 부엌으로 통한 문이 다시 한 번 살짝 열리고 차라는 문가에서 고개를 살짝 빼꼼이 거실 안에 들이밀었다.
동행한 시종장이 차라의 얼굴을 알아보고 샐쭉 웃으며 말했다.
“이 분이 켈란틴 님이시군요. 아버지를 빼닮으셨네요.“
왕자도 흘낏 차라의 발을 보고 속으로 말했다. “너구나?” 그러나 기사는 확신이 있어야 했다. 왕자가 곁의말로 시종장에게 하소연했다. “왜 이름이 두 개지?” 시종장이 나서서 말했다. “제 생각에 아마 켈란틴 님이 살림을 하게 되면서 이 집 식구들이 재투성이란 뜻으로 ‘차라’라는 별명을 만들어 준 것 같습니다.”
차라가 거실로 나왔을 때 곧 현관 노크 소리가 들렸다. 계모가 얼른 현관 문으로 가서 손잡이를 돌렸다. 그러면서 자기도 모르게 버릇처럼 문을 열려 가려던 차라에게 차갑게 “꿈도 꾸지 마라”고 일렀다.
문을 여니 밖에는 임금님과 시종과 나팔수와 왕실 마차와 말과..티아 경이 서 있었다. 밖에서 나팔수가 부는 나팔 소리에 맞추어 임금님과 아버지가 집에 들어섰다. 집 앞 정원 칸들나무의 나뭇가지에는 부엉이가 깃들어 부엉 부엉 울고 있었다.
“전하!”
모두가 무릎을 꿇었다. 켈란틴만 빼고. 켈란틴은 임금님을 스윽 보고 나서 줄곧 꼼짝 않고 새옷을 입은 티아 경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눈앞에 누가 와 있는지를 믿을 수 없어하는 눈치였다. 문가에는 어느덧 밤 비둘기들이 와서 집안을 넘겨다 보며 구구거렸다.
사실 티아 경은 같은 배를 탄 동지들과 함께 힐츠까지 터벅터벅 걸어와서 동지들 하나 둘씩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서쪽 큰바다를 끼고 있는 힐츠 도성을 향하는 사람은 티아 경밖에 남지 않았던 것이다. 동지들은 헤어질 때 울며 서로 입맞추며 축복하며 행운을 빌었다. 그들 자신이 곤고했기 때문에 서로 더욱 의지하게 되었던 것도 있었다.
도성에서 잠깐 쉬다 바삐 온 티아 경은 이사는 흔적도 없이 멀쩡한 거실을 둘러보았다. 에이프런을 입고 있던 켈란틴을 마주한 티아 경의 얼굴은 파래졌다가 다시 하얘졌다. ”켈란틴, 너 뭘 하고 있었니?“ 켈란틴은 이것저것 할 것 없이 아버지의 품 속으로 뛰어들었다. “아빠. 죄송해요. 이건 제 부엌옷이에요.“ 티아 경은 눈물 흘리며 켈란틴을 꼭 안았다.
차라는 아빠의 품에 꼬옥 안겼다. “아빠,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요! 아빠도 힘드셨어요?“ 티아 경은 딸을 다시 한 번 꼭 안아주고 눈물 젖은 얼굴로 차라의 이마에 키스했다. 그리고 나서 한쪽에서 얼굴을 찌푸리고 있던 계모에게 매서운 눈초리로 물었다. 왜 쟤만 앞치마를 두르고 있지요? 계모는 아무 말도 못했다.
”자, 저는 여주인으로서 두 딸들에게 왕자가 발견한 이 구두를 신겨 보겠습니다.“ 계모는 굴하지 않고 얼른 자기네들이 갖고 있던 차라의 구두를 가져왔다. “제 딸들의 발은 작고 예쁘죠.” 계모는 실제로는 이미 좌절한 자신들의 바람에 따라 두 언니의 발을 유리 구두에 욱여신겨 보려 하고 있었다. 레쀠가 거실 구석에 쿠션 위에 놓은 유리 구두를 가져왔다. 차라에게 위협하며 빼앗은 그대로였다. “자 얘들아, 조심해서 신어보자. 대왕 전하. 왕자 전하. 이 아이들은 왕자님을 향한 고운 맘이 가득한 나의 두 딸들입니다.“
이 때 티아 경이 도저히 못참겠어서인지 끼어들었다. “당신은 켈란틴에게는 익숙한 듯 무시하고 말도 없이 지나가는군요. 도대체 내 귀중한 딸에 대한 그 이기심과 무심함은 언제부터요?“ 계모는 입술을 깨물었다.
10장 free from terror
임금님이 나섰다. 먼저 시종에게 손짓으로 현관문을 닫아 달라고 했다. 임금님은 두 손을 기쁜 듯이 비비며 옆에 서 있다가 문이 닫힌 후 즐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레이디, 우리 왕자가 오늘 새벽을 새우며 찾아 헤맨 그 아가씨가 바로 그대로군요!“ 하면서 임금님은 바로 망토 안에서 궁궐에서 가져온 작은 은회색 모종삽을 꺼냈다.
“이제는 여성 여러분이 유리구두를 신어볼 때가 온 것 같네. 다만 내가 알고 싶은 게 있는데. 레이디, 이 삽도 레이디가 어제받은 게 맞죠?” 임금님이 웃으며 물었다.
유리 구두에 발을 끼워넣느라 애를 쓰던 아뷔엘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아뷔엘은 바로 레쀠에게 속삭였다. “뭐라는 거래?” “우리 탄로 났다 탄로 났어."
"빨리 유리 구두를 신어봐, 레쀠야. 이거라도 해봐야지. 난 틀렸어.“라며 아뷔엘은 구두를 집어들어 레쀠에게 주었다. 레쀠는 얼른 유리 구두를 받아 발에 게걸스럽게 신었지만, 근자에 키와 발 크기가 급격히 많이 커진 터라 역시 맞지 않았다.
“네~” 차라가 울먹였다. 티아 경은 어색하게 서 있는 딸을 부둥켜 안고 딸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그리고는 하릴없이 서 있는 계모에게 속마음을 담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는 아뷔엘과 레쀠를 데리고 이 집에서 당장 나가세요.”
차라는 재 묻은 하얀 에이프런에 손을 비볐다. 마지막으로 잔뜩 열이 나고 짜증나 있는 계모에게 눈길을 주고 나서, 차라는 왕자의 손에서 다른 짝 구두를 집어들었다. 그때 왕자가 빠르게 차라에게 속삭였다. “너, 네가 그애지?” 차라는 다른 사람이 눈치 못채게 아주 살짝 왕자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애가 하고 싶어 했어요. 그애가 그랬다고요!” 계모가 큰 소리로 비명을 지르며 얘길 했다. “켈란틴. 정말 새어머니께 네가 살림 하겠다고 말씀드렸니?” 티아 경이 차라에게 얼굴을 돌리며 말했다. 차라는 계모를 돌아보았다. 계모는 차라에게 목 자르는 손짓을 하며 오만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차라는 루다가 한 말을 생각하고 있었다. 루다는 차라에게 세네 번만 나타날 테니 그리 알라고 했었다. 그리고 차라는 루다의 마법이 자신을 얼마나 행복하게 했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차라는 몸을 꼿꼿이 하고 계모를 포함한 여러 사람 앞에서 차분하게 말했다. ”아뇨. 3년 동안 시간이 가면서 집안 일이 제 몫이 됐어요.“ 거실은 난리가 났다.
이 모습에 레쀠의 손에 퍼뜩 힘이 빠지면서 구두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아, 발이 퉁퉁 붓고 있어!” 모두들 레쀠의 말에 그쪽을 주목했다.
이 때 왕자가 얼른 구두를 집으며 소리쳤다. “아버지 전하, 시종장님, 이 분께도 신겨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며 왕자는 엉거주춤 서 있는 차라를 가리켰다.
그 다움으로 행동이 빠른 것은 놀랍게도 임금님이었다.
“그렇군, 그럼 이제 유리구두를 신어 볼 사람은 하나밖에 없군. 레이디 켈란틴!“ 이렇게 말하며 임금님은 차라에게 경의를 표했다. 티아 경은 고마운 맘으로 임금님을 봤다. 그리고 한쪽에 서 있던 차라에게도 손짓했다.
임금님은 물론 허락의 손짓을 했고, 차라는 낯익은 구두 양쪽 모두를 바로 신어 봤다. 다른 마법물처럼 효과가 없어질까봐 조마조마했으나 다행히 너무나 잘 맞았다.
임금님은 이제 아버지와 딸의 나머지 상봉을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 있었다. 문득 곁에서 빛나는 눈으로 케율 왕자가 티아 경에게 말했다.
”경께선 제가 탐라에 가기 직전에 난파하셨다고 소식을 들었습니다. 항해는 어쩌다가 하게 되신 것입니까?“
”아, 탐라 곁에 붙어 있는 작은 나라 님 사람들에게 힐츠의 고유 장점인 뛰어난 승마술을 전수하러 기사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갔던 것입니다.“
“님 사람들이 귀한 기회를 놓쳤군요?“
”하하, 과찬이십니다.”
임금님이 말했다. “티아 경의 딸이 이런 지경에 처해 있는 줄은 미처 몰랐소. 이 나라의 왕으로서 참으로 부끄럽군.“ 계모가 기어이 한 마디 했다. ”티아 경, 나의 남편, 이 집이 이제 나의 소유라는 것 기억나오?“ 티아 경이 뭐라고 대답하기 전에 임금님이 끼어들었다. ”아동학대죄로 이 집은 몰수요. 그 다음에 레이디 켈란틴과 티아 경에게 돌려줄 것이오.“ 계모는 얼굴이 빨개져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니 배임죄로 감옥에 가기 싫다면 당장 짐을 챙겨 당신의 딸들을 데리고 이 집을 떠나시오. 티아 경 어서 배웅 부탁하네. 레이디는 궁성으로 같이 가세.“
차라가 물었다. ”저는 갈아입을 정식 예복이 없는데, 어떡하죠?“ “도성에 다 있다오. 너무 걱정 말고 따라오시오.“
차라의 맘은 기뻐 뛰놀았다. 티아 경이 말했다.
“켈란틴, 한 가지 설명 부탁한다. 무도회에는 어떻게 유리 구두를 신고 차려입고 갈 수 있었지?”
티아 경은 계모를 가리키며 물었다. “보나마나 저 사람이 막았을 텐데.” 구석에 모여 있던 계모와 두 언니가 움찔했다. 사실 그들도 너무 궁금했다. “루다가, 이야기해 주러 집에 자주 오시던 고모할머니 루다가 마법으로 호박마차와 옷과 구두와 흰쥐 말을 준비해 주셨어요. 그런데 마법이 자정이 지나면 풀린다고 주의를 주셨어요.“ ”그랬구나. 아. 고모할머님이라니! 하늘의 축복이다.“
아찔하니 온몸에 긴장이 빠져 아버지의 품에 힘없이 안긴 딸을 안아 들고 티아 경은 왕자에게 장난스럽게 말했다. “집이 아직 몰수 중이니 저는 켈란틴을 황공스럽게도 임금님 마차에 태우고 이제 도성으로 가야겠습니다! 왕자님도 함께 하시겠어요?“
“아무렴요. 그럼요, 아무렴요.” 왕자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임금님은 "그대와 그대의 딸을 기다리겠소! 천천히 오시오."하고 자신의 마차에 탔다.
하인 한 명이 모는 외출용 작은 마차가 계모와 두 언니와 계모가 가방에 쑤셔넣은 액세서리와 보석들을 싣고 자못 빨리 떠나자, 아버지의 품에 안겨 눈을 살며시 뜨고 긴장이 풀리고 차츰 미소도 짓게 된 레이디 차라, 켈란틴은 은회색 모종삽을 품고 집을 나와 임금님과 케율 왕자와, 사랑하는 아버지와 동행해 임금님의 마차를 타고 도성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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